IMDB: 7.9/10 | Rotten Tomatoes 95%

*이 글은 영화의 러닝타임 23분 정도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시점까지의 스포일러는 포함되어 있지만, 핵심적인 스포일러는 미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은 영화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영화가 됩니다. 열 사람이 보면 열 개의 다른 영화가 태어나죠.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영화도 그러합니다. 그게 예술의 위대한 점이겠죠.

저도 영화를 볼 때 저만의 관점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건 없습니다. 애초에 답은 없으니까요. 다르단 건 오히려 좋은 겁니다. 모두가 영화를 보고 똑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지루한 세상일까요. 그래서 제 생각을 먼저 밝히고 소통하려 합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 역시 여럿입니다. 제가 해보려는 것은 영화를 ‘읽는’ 것입니다. 한 씬은 눈깜짝할 사이 지나가지만, 각 장면은 감독의 고심 끝에 나온 결과입니다. 찰나에 지나가는 씬을 음미하면, 감독의 생각이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영화를 ‘읽어 보려’ 합니다


세 번째 작품으로는 우디 앨런 감독의 1979년도 작 <맨하탄>을 골랐습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KANA로서 맨하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 의미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외출도 못하는 답답함을 영화 속에서라도 마음껏 맨하탄 이 곳 저 곳을 활보하시며 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추천해주신 진우 회원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드립니다.

지역을 제목에 포함한 영화가 많습니다. 우디 앨런 감독만 해도 기존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다 이제는 전 세계 주요 명소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죠. 각 영화에는 각 도시의 멋진 풍경이 스크린에 담겨 있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멋진 영화적 경험이 됩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지역 기반 작품을 몇 개만 언급해보면,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 <Vicky Cristina Barcelona>, (이 작품에는 실제 부부인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가 부부를 연기합니다. 부부 사이에 끼어든 스칼렛 요한슨도 보게 되죠)

파리를 배경으로 한 <Midnight in Paris>, (포스터 배경에 고흐의 그림이 나오니 두 번째로 다뤘던 <러빙 빈센트>가 생각나서 반갑네요 ㅎㅎ)

로마를 배경으로 한 <To Rome with Love>가 있습니다.

 

이 중 우디 앨런의 대표작을 뽑으라면 역시나 <맨하탄>이겠죠. 이 영화는 기존 스탠드업 코미디언 혹은 <돈을 갖고 튀어라 / Take the Money and Run> 와 같은 코미디 영화 감독으로만 알고 있던 우디 앨런을 본격 예술 영화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위 출세작입니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한국 영화도 지명을 제목에 넣은 작품이 더러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겠죠. (Shout out to 진우!) 밀양은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secret sunshine 이라는 뜻조차 의미심장합니다. 방금 찾아본 <밀양>의 포스터가 참 좋네요. 비가 온 뒤 송강호 배우가 마치 짝사랑을 하듯 전도연 배우를 뒤에서 쳐다 보는 샷인데, 시선의 방향이 전도연 배우는 햇살(햇살은 희망일 수도, 종교일 수도 혹은 사랑일 수도 있죠)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반면, 송강호 배우가 전도연 배우의 등을 보고 있네요. 게다가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봐선 한참 전 비 맞을 그녀를 생각하고는 뛰어 왔을 것만 같네요. 영화에서 전도연 배우와 송강호 배우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더 의미심장한 구도입니다.

그리고 박찬옥 감독의 <파주> 역시 있습니다.

영화가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장소가 가지는 상징성이 있겠죠. <파주>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파주는 안개의 도시로 유명하죠. 안개라는 것이 스토리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실제로 영화 초반에 안개를 의미심장하게 다루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당 지역이 가지는 느낌은 영화의 의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소개 작품의 배경인 맨하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맨하탄은 뉴욕의 코어와도 같은 곳입니다. 뉴욕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도시를 뽑는다면 가장 뽑힐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죠. 저는 ‘뉴요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이 도시가 다르다 생각했으면 도시에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따로 있을 정도일까 생각을 했었더랬죠. 한국의 어떤 도시도 이런 곳이 따로 있진 않아 보입니다. 전 세계로 보아도 파리지앵 정도가 생각이 날 뿐이죠. 그정도로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뉴요커는 스스로를 무엇이 다르다 생각할까요?

 

맨하탄 거리를 나가보면, 우선 그들은 급합니다. 항상 바빠 보이고, 말도 빠르고 심지어 걸음도 빠릅니다. 도시는 항상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때문이죠. 또한 그들은 똑똑합니다. 적어도 똑똑해 보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있다 믿는 그들은 대화 주제가 예술이건 비즈니스건 일반적인 세상사이건 간에 관심이 많죠. 많이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해야 합니다. 어쩌면 할 말이 많기 때문에 말이 빠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맨하탄은 또한 기회의 도시입니다. 이는 커리어나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네트워킹이나 남녀상열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넘쳐나는 사람은 넘쳐나는 데이트 기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회가 많다는 건 당연하게도 많은 사건 사고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만사에 관심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기회를 포착한 사람은 가십을 이용해 유명세와 부를 얻습니다. 미드 <가십걸>이 괜히 맨하탄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겠죠.

 

잠시 떠올려도 맨하탄의 특이점이 술술 나옵니다. 이와 같은 맨하탄의 특이사항이 이 영화엔 얼마나 담겨 있을까요? 지명을 딴 이유가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제 생각이 맞다면, 방금 거론한 사항들이 영화에 드러나기 마련일 겁니다. 한 번 주의깊게 살펴보시죠.

 

영화가 시작되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은 영화가 흑백영화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이미 만들어진지 40년이 지난 옛날 영화이긴 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9년엔 이미 흑백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은지 오래였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흑백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유가 있겠죠. 이 영화는 그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흑백 영화로서 가장 최근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아티스트> 인데,

이 영화가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배경 자체가 과거 할리우드이기도 하고, 영화의 내용 역시도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등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영화가 충돌하는 이야기죠.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유산인 흑백영화 (거기에다 화면 사이즈 역시 좀 더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 를 가져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맨하탄>은 <아티스트> 만큼 자명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엔 감독은 이 영화를 생기 발랄한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의 뉴요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매우 시니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사에서는 신랄하거나 혹은 무미건조한 빈정이 넘쳐나죠. 화면 역시 흑백으로 만듦으로써 시각적인 표현 역시 무미건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님 덕분에 안 그래도 건조한 문체의 이 포스팅 역시도 더 딱딱헤 보이겠군요…)

 

이제 인물로 넘어가보죠. 주인공입니다.

우디 앨런 감독이 스스로 연기했습니다. 우디 앨런은 연출을 하면서도 종종 자신의 작품에 등장합니다. 사실 왜소하지만 까탈스런 뉴요커를 연기하는 데 그만한 사람이 없기도 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이혼한 티비 작가로 나옵니다. 실제 그는 유명한 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 각본가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그 해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에는 후보로 오르지 못했지만, 각본상에는 후보로 올랐다는 점은 단적으로 그의 각본 실력을 보여주기도 하죠. 여전히 그는 스스로의 작품에 각본을 직접 씁니다. 1935년 생인 그는 단연 살아있는 감독 중 가장 노장 감독의 축에 속합니다. 다른 노장 감독들이 많지만 여전히 각본을 직접 쓰고 있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배우 출신의 노감독이라는 관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비교를 해볼 수 있습니다. 1930년 생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여전히 좋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내는 노익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는 연출만 할 뿐 각본을 직접 쓰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디 앨런은 가히 대단하죠.

주인공을 텔레비전 작가로 정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일면을 본인이 연기할 캐릭터에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대부분 영화 감독이거나 혹은 유사한 예술 쪽 사람인 것과 비슷하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인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직업의 주인공 대비 본인의 경험과 성격이 좀 더 우러날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사실 우디 앨런이 본인 영화의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은 홍상수 감독과 유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본인과 비슷하거나 자신의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대표하는 주인공을 창조해낸 후, 그의 위선 혹은 가식을 드러내며 조소하는 식이죠. 이 영화의 오프닝 역시 홍상수 감독 영화의 오프닝과 유사합니다. 마치 카메라가 멍하니 풍경을 응시하는 듯 하죠. 그럼 이 영화의 오프닝이 어떻길래요?

영화가 시작하면 맨하탄의 고층 빌딩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디 앨런의 나레이션이 흐르죠. “Chapter 1”. 영화를 이렇게 챕터로 나눌 경우, 좀 더 영화가 분절적으로 보입니다. 대체로 더 좋습니다. 관객 역시 챕터 별로 이야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좀 더 구조적인 이해가 가능하죠. 마치 장문의 글에서 문단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각 문단의 주제를 모으면 전체 글이 하고 싶은 말이 보이죠. 그리고 각 문단의 흐름을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좀 더 구조적으로 이해되죠. 그리고 새로운 챕터가 지속적으로 시작될 때마다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 있으므로 극의 스피드도 좀 더 빠르게 느껴지죠. ‘벌써 하나의 이야기가 끝났어?’ 라는 느낌으로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은 아마 쿠엔틴 타란티노일 겁니다. 그는 자주 챕터로 영화를 나누곤 합니다.

위는 <The Hateful Eight>의 네 번째 챕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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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층 빌딩으로 돌아가보죠. 고층 빌딩은 맨하탄을 상징하는 가장 좋은 그림일 겁니다. <킹콩>과 같은 영화처럼 영화 역사의 가장 고전 때부터 맨하탄의 고층 빌딩은 영화 제작자들을 매료시켜 왔죠. 하지만 차가운 뉴요커가 만든 이 영화가 이 장면으로 보여주면서 <킹콩>의 스펙터클을 원했을리는 만무하죠. 그렇다면 왜 중요한 오프닝 샷을 여기로 썼을까요? 특히나 흑백으로 말이죠. 이 뿐만이 아니죠. 영화의 포스터 안에 맨하탄이라는 글씨조차도 고층 빌딩의 첨탑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미지가 가장 처음에 나온 이유는 제 생각에는 빌딩의 생김새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층 빌딩은 높게 솟아 있습니다. 마치 뉴요커 한 명 한 명의 높은 자아의식과 같죠. 마치 누가 더 높은지 그래서 서로를 내려다 볼 수 있는지 경쟁하는 것만 같습니다. 동시에 서로 분명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높기 때문에 서로 좀 떨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거죠. 그러다 보니 굉장히 서로 간의 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뉴요커 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 같죠. 어디보다도 붐비는 도시이지만 동시에 어디보다도 외로울 수 있는 도시가 맨하탄이죠. 다시 말해 맨하탄의 건물들을 보여주는 것은 맨하탄에 사는 뉴요커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징한 시각 이미지입니다.

근데 포스터를 잘 보시면 또 하나의 건축물이 보입니다. 비록 글자가 고층 첨탑으로 이루어져 있을 망정, 가장 제대로 크게 보이는 건축물은 브루클린 브릿지입니다. 다리는 무엇인가요? 다리는 서로를 잇는 것입니다. 맨하탄은 섬처럼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보니 강 건너 지역들과 다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다리가 몇 개 있죠. 다리는 저에겐 희망으로 보입니다. 비록 우리가 높은 철옹성 안에 있긴 하지만 누군가와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죠. 더 다행인 것은 포스터에 한 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겁니다. 실루엣으로 보아 남녀 같네요.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에서 남녀상열지사는 굉장히 중요한 테마입니다. 비교적 노년에 내는 최근의 작품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남녀 문제죠.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캐릭터 소개를 이어가면 이 영화에는 우디 앨런이 연기한 주인공 남자를 둘러싸고 총 세 명의 여자가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첫 번째 여자는 다이앤 키튼이 연기한 ‘매리’입니다. 다이앤 키튼은 우디 앨런 감독 영화에서 단 한 명의 여배우를 꼽으라면 아마 뽑힐 확률이 가장 높은 배우입니다. IMDB에 따르면 그와 8개의 작품을 같이 했고, <맨하탄>과 더불어 감독의 출세작인 <애니 홀>의 주연이기도 하죠. <애니 홀>은 이 영화보다 2년 전에 나왔습니다.

“She and Woody Allen made 8 movies together: Play It Again, Sam (1972), Sleeper (1973), Love and Death (1975), Annie Hall (1977), Interiors (1978), Manhattan (1979), Radio Days (1987) and Manhattan Murder Mystery (1993).”
(source: https://www.imdb.com/name/nm0000473/bio?ref_=nm_ov_bio_sm)

낯익은 얼굴이죠? 젊은 시절의 메릴 스트립입니다. 위의 다이앤 키튼 대비 메릴 스트립의 얼굴은 상당히 딱딱해 보이죠? 그 이유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엘 헤밍웨이 입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여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오릅니다. 스틸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녀가 이 영화에 출연할 땐 아직 20살이 되지 않았습니다. IMDB 기준으로도 이 영화는 그녀의 세 번째 영화입니다. 신인이나 다름없죠.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성취를 대단한 성취를 이룬 그녀지만, 아쉽게도 이후 필모그래피가 그리 성공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적어도 현 시점까지는요.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거나 심지어 수상까지 한 배우들이 있습니다. 최근 배우 중에는 20대 초반에 아카데미를 수상한 제니퍼 로렌스가 생각나네요. 아마 가장 강렬한 케이스는 안나 파퀸이 아닌가 합니다. <피아노>라는 굉장히 좋은 여성 영화 작품의 아역이었던 그녀는 놀라운 연기로 그 해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장면은 아래 비디오에서 보실 수 있는데, 지금 봐도 너무나 깜찍하네요. 최근에 <아이리쉬 맨>에서 오랜만에 그녀의 모습을 보았는데 퍽 반갑더군요.

다시 오프닝 씬의 나레이션으로 돌아가 봅시다. 영화의 챕터라고 생각했던 나레이션은 사실 그가 무엇인가 녹음을 하고 있는 씬이었네요. 그는 이리 저리 말을 바꿔 가면서 계속 녹음을 합니다. 녹음이 잘 안 될 때는 자신의 재능 없음을 탓하기도 하죠. 사실 그는 책을 쓰려 하고 있습니다. 첫 챕터의 첫 문장은 이렇게 하려 하죠. 그는 뉴욕 시티를 너무나 사랑한다.

혹시나 궁금하실까봐 오프닝 씬 나레이션의 전문을 붙입니다.

“Isaac Davis: Chapter One. He adored New York City. He idolized it all out of proportion. Eh uh, no, make that he, he romanticized it all out of proportion. Better. To him, no matter what the season was, this was still a town that existed in black and white and pulsated to the great tunes of George Gershwin. Uh, no, let me start this over.

Chapter One: He was too romantic about Manhattan, as he was about everything else. He thrived on the hustle bustle of the crowds and the traffic. To him, New York meant beautiful women and street smart guys who seemed to know all the angles. Ah, corny, too corny for, you know, my taste. Let me, let me try and make it more profound.

Chapter One: He adored New York City. To him it was a metaphor for the decay of contemporary culture. The same lack of individual integrity that caused so many people to take the easy way out was rapidly turning the town of his dreams in - no, it's gonna be too preachy, I mean, you know, let's face it, I wanna sell some books here.

Chapter One: He adored New York City. Although to him it was a metaphor for the decay of contemporary culture. How hard it was to exist in a society desensitized by drugs, loud music, television, crime, garbage - too angry. I don't want to be angry.

Chapter One. He was as tough and romantic as the city he loved. Behind his black-rimmed glasses was the coiled sexual power of a jungle cat. Oh, I love this. New York was his town, and it always would be.”

나레이션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하는 동시에 자기 혐오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신경을 쓰죠. 그렇다고 그들을 좋아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혐오에 가깝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이죠. 이런 부분이 우디 앨런이 가진 현대인에 대한 통찰이라고 봅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비웃고 있지만, 실컷 비웃다 보면 급작스럽게 그에게서 나의 어떤 면을 발견하고는 서늘해지죠.

맨하탄의 이 곳 저 곳을 비추던 카메라는 이윽고 실내로 들어갑니다. 거기엔 네 명의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죠.

이 씬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디 앨런(극 중 이름 아이작) 마리엘 헤밍웨이(극 중 이름 트레이시)가 연인이고, 트레이시는 17살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TV 작가이자, 이혼남이죠. 트레이시는 고등학생입니다. 우디 앨런은 실제 삶에서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배우자를 두고 있습니다. 한국인 혈통을 가진 그의 부인 순이 씨가 70년 생이니 대략 35살 차이가 나네요.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 데에는 유명한 스캔들이 있는데 그걸 언급하는 순간 더 이상 영화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어지니 이 쯤에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죠.

아이작의 옆에 있는 친구는 그의 절친인 예일(배우: 마이클 머피)입니다. 관객들은 그가 결혼한 상태이지만 내연녀가 있음을 알게 되죠. 시작부터 심상치 않죠? 이처럼 부도덕하거나 당혹스러운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맨하탄의 데이팅 씬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합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술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죠. 우디 앨런은 고의적으로 이렇게 논란이 될 수 있는 설정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눈 앞에 직시하게 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생각을 자극하죠.

다음 씬에서 아이작은 그의 이혼한 전처를 찾아갑니다. 그녀가 바로 질(메릴 스트립)이죠. 그런데 둘은 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이작이 일방적으로 질이 회사에서 나오길 기다린 것입니다. 아이작이 그녀를 찾아간 이유는 출판을 앞두고 있는 질의 책 때문입니다. 그녀의 자서전인 모양인데, 전남편인 그에 대한 남사스러운 내용까지 들어간다고 하네요. 가장 내밀한 부부의 이야기마저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뉴욕의 모습입니다.

책 제목마저도 굉장히 강렬하죠? 그녀는 현재 레즈비언 연인과 함께 새 가정을 차리고 아이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나름 행복한 가정 생활을 꾸리고 있죠.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아이작의 연애 생활은 어떨까요?

첫 씬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17살의 트레이시를 만나고 있습니다. 가벼운 장난처럼 그녀와의 연애를 생각하고 있는 아이작과는 다르게 트레이시는 상당히 진지하죠. 아래 스틸만 보아도 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한 눈에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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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두고 아이작은 오히려 너무 의존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탓합니다. 나이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겁한 연애를 하는 것은 아이작이죠. 트레이시는 생각보다 성숙하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독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인물은 그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나오는 반면, 트레이시만큼은 끝까지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에게 그녀는 우디 앨런이 이 차갑고 위선적인 맨하탄이라는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친구인 예일의 이야기로 돌아오죠. 예일 역시 범상치 않은 연애를 하고 있죠.

그가 만나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매리(다이앤 키튼)입니다. 그녀는 예일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만나고 있죠. 하지만 그가 가정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꽤나 불편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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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장소는 갤러리입니다. 넷은 갤러리에서 보았던 작품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특히 아이작(우디 앨런)과 매리(다이앤 키튼)의 의견이 매우 상충됩니다. 아이작이 좋게 본 작품들은 매리가 혹평을 하고 아이작이 욕을 하는 작품들은 오히려 매리가 좋게 보았죠. 그리고 대화를 통해 우리는 두 사람이 모두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음을 알게 되죠. 대화는 미술을 넘어 음악, 문학, 비문학, 영화로 번지죠. 어떤 주제의 이야기든 둘은 물과 기름처럼 보입니다. 서로 굽힐 줄을 모르죠.

둘과 헤어진 아이작 커플. 아이작은 헤어진 이후 줄곧 매리에 대한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예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죠. 특히나 그는 그가 매우 좋아하는 감독인 잉마르 버그만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이 못마땅해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반 고흐를 잘못 발음했다고도 지적하죠.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사람이 반 고흐를 논했다 이거죠.

 다음 씬은 그가 일하는 일터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TV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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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본인의 일에 신물이 난 상태죠. 자신들의 프로그램은 공허한 내용이라 비판하죠. 동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지만 그의 언성은 계속 높아집니다. 방송을 보는 청중들의 수준도 낮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고는 충동적으로 직장을 때려치고 나오고 맙니다. 하지만 다음 씬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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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에서 읽히듯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죠. 이렇듯 그는 이성적인 지식인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마저 컨트롤하지 못하는 소시민입니다.

다음 씬에서 어느 파티를 참석한 아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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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기 보이는 여성의 뒷통수는 누구일까요?

바로 매리입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둘은 이렇게 자꾸 마주치게 되네요.

 

과연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할까요?
지금 사귀고 있는 트레이시와는 어떻게 될까요?
두 여자와의 관계가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또 이 영화 이후 40년이 넘은 지금의 맨하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앞서 말씀 드렸듯, 우디 앨런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죠. 사실 우디 앨런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불참 이유에 대해 혹자들은 그가 그의 사랑하는 도시 뉴욕을 떠나기 싫기 때문이라고들 하죠. 그 스스로도 뉴욕 술집에서 클라리넷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농반진반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9/11 사태 이후 첫 아카데미 시상식이었습니다. 이 역시 뉴욕을 위한 것이었죠. 헐리우드에 9/11 이후 뉴욕에 대한 지원에 감사하고 향후 지속적으로 뉴욕에서 영화를 만들기를 요청하기 위해 갔습니다.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명예로운 자리에 정작 자신의 영화가 후보로 올랐을 때는 왜 가지 않은 걸까요? NPR의 ‘Why Woody Allen Is Always MIA At Oscars’ 에 따르면, 그의 전기를 쓴 Eric Lax 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LAX: It's really almost impossible, as he puts it, to judge art, that it's so subjective, you can't really say, well, this performance is better than that or that writing is better than this and that, if you get caught in that trap of relying on other people, however great they are, to tell you whether you're any good, you're either going to consciously or subconsciously start playing to that group.
(source: https://www.npr.org/2012/02/24/147367956/why-woody-allen-is-always-mia-at-oscars)

 

예술이란 실로 주관적인 것입니다. 같은 예술 작품도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감명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기도 하죠. 마치 이 영화 속에서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이 처음 만났을 때의 언쟁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디 앨런은 오히려 대중의 반응에 더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카데미를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구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독창성이 유일한 무기인 예술가에겐 새겨 들어야 볼만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Writer: Seil Kim I 김세일 <seil88.ka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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